초창자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쌍봉사라는 사명이 보이는 최초의 기록이 동리산문의 개산조 적인선사 혜철(慧徹)(혹은 慧哲. 785~861)의 비문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늦어도 신라 신문왕 원년(839)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839년 2월 당에서 귀국한 慧徹은 얼마 후 쌍봉사에서 하안거를 보낸 적이 있다.
"무주 관내의 쌍봉란야에서 여름 결제 때 날이 가물어 산이 마르고 내가 말랐으며, 비가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주사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는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빌었다. 잠시 후 단비가 조금씩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얼마 후 큰 비가 내렸다"는 것은 적인선사의 법력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쌍봉사가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방증이되기 때문이다.
혜철 이후에는 철감선사 도윤(798~868)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22년간의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풍악 장담사에 머물다가 후에 이곳 쌍봉사로 이석한 듯하나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관한 유일한 기록인 『조당집』권17에 비록 그가 쌍봉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으나 "쌍봉화상"이라는 제하로 도윤의 일대기를 적고 있는데다 그의 부도탑이 쌍봉사에 남아 있고, 또한 제자인 징효 절중(826~900)이 스승의 탑에 참배하러 간 사실이 있어 철감이 이 절에 주석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쌍봉사라는 사명의 유래를 알려주는 문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쌍봉사 사적비』에 "중조산의 한 줄기가 왼쪽으로 돌아서 애워싸고, 절을 향해 우뚝 솟아 마치 남북의 두 봉우리가 서로 읍하고 있는 것 같아서 쌍봉이라고 하였다.
혹은 본시 양나라 소주목 사람인 철감국사가 소주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천감연간(502~520)에 배를 타고 동래하여 이 산에 머물면서 절을 짓고 이름을 쌍봉이라 하였으니, 그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함이라도 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사적비의 기록은 연대 상에 문제가 있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고려 문종 22년(1068)에는 혜소 국사(1045~1121)가 창건 이후 두 번째 중창하였는데 당시의 건물은 48동이나 되었다고 한다.
혜조 국사는 『원감록』에도 자주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로 순천 정혜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라고 추정되는 탑비가 절의 동쪽에 있었으나 유실되고 말았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사적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고려사』권42, 최충헌(1149~1219)전에 최씨정권 제3대 집정자인 최항(?~1257)이 송광사 2세 사주(社主)인 진각국사 혜심의 제자가 되어 쌍봉사에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국가에서 중시한 도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종 20년(1428) 전라관찰사 금방이 3창한 이후 세조 14년(1468)에는 세조의 원당을 세우고 사방 30리에 달하는 불량답을 확보하면서 사세가 확장된다.
<그리하여 성종 10년(1479)에는 백연암과 월봉선사 부도를, 중종 6년(1511)에는 혜공화상이 서부도를 중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암 조광조(1482~1519)와 뜻을 같이한 학포 양팽손(1480~1545)이 능주로 귀양와 사사된 정암 조광조가 사후 명현이 되자 쌍봉사는 양씨 문중의 세력에 눌려 점차 피폐하게 된다. 선조 3년(1570) 죽수서원이 건립되면서 조광조와 양팽손 등 유현의 위패를 배향하면서 죽수서원에 예속된 사찰로 전락하여 쌍봉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그런 중에도 선조 10년(1557) 선종대선사가 부도암을 중창하고, 동 12년(1579)에는 보정화상이 서부도를 중창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건물의 태반이 소실되는 불행을 겪고 만다. 그러다가 인조 6년(1628) 요의선사가 대웅전을 중수하는가 하면 동 11년(1633)에는 인환 선사가 팔상탱화를 조성하고 단청 . 보수 하고, 동 15년(1637) 수인이 대법당 후불탱화, 명부전 지장보살과 시왕탱화 등을 조성하여 옛 가람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li>
근대에 이르러서는 고종 39년(1902) 주지 벽운 스님이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를 봉안하고 또, 1919년 효해 스님이 신중탱화를 봉안하고, 1935년에는 오백나한상을 백양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20세기에는 6. 25로 인하여 다시 소실되는 불운을 당하여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게 된 초라한 사찰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1962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였으나 1984년 다시 실화로 소진되고, 1986년 다시 복원하면서 1994년에는 연못과 그 주변을 발굴하여 옛 모습을 찾는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