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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사

만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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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사  

참고설명
만연사 연혁
만연사 연혁
화순읍 동구리 만연사 계곡에 있는 만연사는 고려 21대 희종 4년(1208)에 만연선사(萬淵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이곳에 절터가 정해진 연유는 만연선사가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로 돌아가는 길에 무등의 주봉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면서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서 있는 골짜기에서 잠시 쉬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 16나한이 석가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을 꾸다가 잠이 깨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눈이 내려 백설이 온 누리를 덮었는데 만연선사가 누운 자리 주변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머물며 토굴을 짓고 수도하다가 만연사를 세웠다고 전해 오고 있다.
만연사에는 송광사 초대 주지였던 보조국사의 사리각을 비롯하여 대웅전·복왕전(卜王殿)·나한전 등 3전(三殿)과 8방(八房)인 승당(僧堂)·선당(禪堂)·동산실(東山室)·서상실(西上室)·동별실(東別室)·수정료(守靜寮)·송월료(送月寮)가 있었다. 중앙에는 규모가 큰 설루가 있었으며 설루 아래에 사왕문과 삼청각이, 그리고 사암(四庵)인 연혈암(燕穴庵)·학당암(學堂庵)·침계암(枕溪庵)·동림암(東林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건물은 소실되어 지금은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寒山殿)과 요사(寮舍)가 있고 선정암(禪定庵)과 성주암(聖住庵) 등 두 암자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부터 4여년에 걸쳐 철안 주지(澈眼 住持)가 재건한 것이다.
만연사의 삼존불(三尊佛)과 십대대왕상(十代大王像)·16나한상은 향나무로 조각한 고려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비현화공(丕賢畵工)의 작품이라고 전해 오고 있는 가로 30자, 세로 20자의 괘불(掛佛)이 있고 범종(梵鍾) 또한 오랜 연륜을 간직하고 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창의(倡義) 일지(日誌를 살펴보면 12월 16일자 기록에 만연사 스님 지삼(智森), 지환(智環), 경훈(景勳) 등이 종이(紙) 10속(束)을 바쳐 군중일지를 만드는데 도왔다. 30일 장(醬) 5 항아리와 마른나물 100속을 의병장 조수성(曺守誠)에게 보내왔다.
1637년(인조 15) 정월 10일 만연사 지삼(智森), 지환(智環) 등이 밥쌀 20말과 산나물 200묶음, 장지(壯紙) 5묶음, 유지(油紙) 2묶음, 삼으로 만든 신(麻靴) 60켤레를 바쳤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1739년(정조 17) 9월에 만연사에 큰 화재가 났었다. 고려시대 이후부터 국내에서 유일하게 모시고 있었던 진언집(眞言集)의 판각(板刻)이 소실되었다. 1794년(정조 18)에 도료장(都料匠) 경관(慶冠)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밖에 한말(韓末)에 당시 국창(國唱)으로 지칭받았던 이동백, 이날치 선생이 만연사에서 창악(唱樂)을 연마했고 다음 정광수·임방울의 당시 명창들이 이곳에서 창악을 가르쳤었다고 한다.

만연사 전설
만연사 전설
화순의 진산 만연산(萬淵山)의 옛 이름은 나한산(羅漢山)이다.
나한산을 만연산으로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나한산에는 암자가 많았는데 그중 한 암자에 예쁜 상좌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만연(萬淵)이었다. 한 스님이 만연을 연모하여 그녀를 숲 속으로 유인, 겁탈하자 만연은 목숨을 끊는다.
그 날 밤 스님의 꿈에 만연이가 나타났다.
「나는 죽었으나 나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지은 죄업으로 죄옥을 면치 못 할 것이니 하루 속히 너의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치고 나한산을 떠나 다시 착한 불자(佛者)가 되어라.」
그는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꿈을 주지 스님에게 들려 드린 다음 나주목사를 찾아가 알아보니 과연 득남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기 전에 나주 목사의 꿈에 어린 사미승이 나타나 「저는 화순 나한산에서 공부하던 몸으로 억울하게 횡사를 당하고 다시 인연따라 목사님 댁에 환생한 만연이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
목사는 이상하게 여겨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몽한 상좌의 말대로 이름을 만연이라고 지어서 애지중지 길렀다. 열여섯살이 되자 만연이는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목사로부터 하락을 얻어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아버지인 나주 목사는 비명으로 죽어 환생한 아들의 인연에 따라 산기슭에 절을 세워 아들 만연이에게 전해 주며 불도를 닦도록 하였다. 그후부터 이 절을 만연사(萬淵寺)라고 하였으며 만연사가 있던 나한산을 만연산이라 불렀다. 이 절에는 진각국사가 심었다는 둘레 3m, 높이 29m의 고목이 입구에 서 있다.
절의 서쪽 계곡에는 옛날 만연이가 살았다는 작은 암자터가 있다. 이 암자터에도 진각국사가 심었다는 거수(巨樹)가 있고 11기의 부도가 있는데 절터는 스님들이 열반하면 여기에서 다비식을 거행했다.
「화순읍지」에 진각국사의 목부도(木浮屠)가 여기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찾을 길 없다. 그리고 절 입구 노거수(老巨樹) 아래에는 석불이 있었는데 한때 화순중학교 동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6·25때 학교에 불이나 그만 석불도 학교 파괴와 더불어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만연사 주지 스님의 끔에 부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머리와 얼굴에 심한 상처가 있어 고통이 심하니 나를 하루 빨리 구하여 달라」하였다. 이 꿈은 여러 번 계속 되었다.
「계시는 곳을 알려 주십시오.」
주지 스님은 조석 공양과 더불어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한 중학생이 절을 찾아와 놀면서 화순중학교정에 돌부처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즉시 스님께서 중학교를 찾아갔다. 중학교정과 동산을 두루 살펴보니 꿈속에서 보았던 큰 나무가 있었다.
스님은 그 나무 밑을 파 보았다. 과연 석불이 얼굴에 많은 상처를 입은 채 묻혀 있었다.
스님은 깜짝 놀라 석불을 일으켜 안은 순간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나무관세음보살.....」
그 후 만연사로 모셔 파괴된 안면 부분과 손을 보수하여 천년 거목아래 몇 년 전까지 모셨으나 요즈음 다시 매안(埋安)하여 없어졌다.
그러나 새롭게 단청한 법당과 명부전에는 참새들이 모여 지저귀고 불법의 청정을 말하는 듯 뜰 앞 백일홍의 푸른 잎과 붉은 꽃은 유난히 싱싱하여 대조를 이루웠다.
폭포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소리는 속진을 씻는 듯 정신이 상쾌하고 먹물에 담근 스님의 옷소매에 맑은 바람이 스쳐가는데 또한 주름진 얼굴에 인자스런 미소는 관음보살의 자비가 흐른다.
만연사에는 도지정 보호수(제 10, 77호) 전나무가 있는데 둘레 3m, 높이 27m이며 만연사의 역사와 함께 자라고 있는 노거수이다. 만연사의 창건을 기념하여 우리 고장이 낳은 고승 진각국사가 손수 이 경내에 심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어 8백여년의 연륜을 헤아리며 만연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유일한 증언자인 셈이다. 이 만연사는 고요하고 계곡의 물이 좋아 많은 소풍객이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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