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리 대전마을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의 유물이 함께발굴(1989년, 충북대 이융조 교수팀)되어 적어도 이곳에서 5만년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면내에 149기 분포하고 있다.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벽卑離國)의 일부이었다.
백제때에는 두부지현(豆夫只縣) 의 일부이었다.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에 두부지현(豆夫只縣) 을 동복현(同福縣) 으로 개칭하여 곡성군(谷城郡)에 붙일 때 곡성군 동복현내의 자치고을 대곡현(大谷縣, 현재 대곡리 부근) 지역이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에 동복현이 곡성군 소속에서 보성군 소속으로 바뀌면서 보성군 동복현내의 자치고을 대곡현(大谷縣) 지역이었다.
1280년(충렬왕 6) : 승 祖琰(祖英)의 고향이라 하여 자치고을 동복현에 중앙관리 감무가 파견되어 그 관할하에 있었다.
1396년(태조 5) : 동복감무사 화순현을 겸임할 때 그 동복현의 일부로 있었다.
1405년(태종 5) : 동복현에 있던 감무를 화순현으로 옮길때 동복현의 일부로 있었다.
1407년(태종 7) : 동복현과 화순현을합하여 복순현(福順縣) 이라 부를 때 복순현의 일부로 있었다.
1413년(태종 13) : 복순현을 화순현으로 개칭할 때 화순현의 일부로 있었다.
1416년(태종 16) : 화순현을 다시 화순현과 동복현으로 분리하여 동복현에 현감을 둘 때 동복현감의 관할을 받았다.
1655년(효종 6) : 동복현 객사에 둔 연전패가 불에 타자 동복현이 폐현되고 화순현에 합하여지면서 화순현의 일부로 있었다.
1664년(현종 5) : 화순현을 다시 화순현과 동복현으로 분리할 때 동복현의 일부로 있었다.
1759년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동복현 7개면 중 내남면(內南面)과 외남면(外南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동복현 7개면중 내남면(內南面) 과 외남면(外南面)으로 되어 있다. 관할리는 내남면이 24개리, 외남면이 12개리이다.